간만에 불붙은 나의 공상 트릴로지 최종편
2편에서 에이전트가 중개 플랫폼을 우회하고 크리에이터-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시나리오를 얘기했음. 근데 글을 쓰고 나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었는데, 출발점은 의외로 게임이었음.
리쉬안하오 사건
2022년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 준결승. 중국의 리쉬안하오 9단이 세계 최강 신진서 9단을 완파함. 그런데 대국 직후 같은 중국 팀 동료인 양딩신 9단이 공개적으로 폭탄을 터뜨림. "모든 전자기기가 통제된 밀실에서 20번기를 두자. 내가 지면 은퇴하겠다." AI 치팅 의혹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 커제, 천야오예 등 중국 탑 기사들이 줄줄이 동조했음.
근거는 명확했음. 20대 후반에 갑자기 실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점, 대국마다 AI 일치율이 70%를 넘긴 점 — 인간의 영역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수치였음.
그리고 결말이 더 골때리는게, 중국바둑협회는 "증거 없음"으로 사건을 덮었고, 의혹을 제기한 양딩신에게 오히려 6개월 시합 정지를 때림. 진상은 영원히 미궁에 빠짐. 검증을 중앙 기관에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광클과 같은 구조
이 사건이 바둑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있음. 온라인 체스, 하스스톤, 장기류까지 — AI가 인간을 압도하는 모든 두뇌 게임에서 같은 문제가 확산되고 있음.
지금은 "이 사람 수의 엔진 일치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같은 통계적 방법으로 어느 정도 탐지가 가능함. 근데 AI가 더 정교해지면 이것도 무력화됨. 엔진 최적수를 그대로 두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자연스러운 범위 내에서 살짝 더 나은 수"를 제안하는 AI가 나오면, 통계적으로 걸러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짐.
이게 1편에서 다뤘던 에이전트 시대의 광클 문제랑 구조가 똑같음. 모든 사람이 에이전트로 동시에 티켓팅을 하면 광클이 무의미해지듯이, 모든 사람이 AI 어시스트를 쓸 수 있으면 온라인 두뇌 게임의 경쟁 자체가 무의미해짐. 수요초과 시장에서 "빨리 누르는 능력"이 의미를 잃는 것처럼, 게임에서 "순수한 실력"이 의미를 잃는 것.
신뢰 체인이라는 답
그래서 같은 질문이 나옴. 그러면 어떻게 해?
사람끼리 경쟁하고 싶은 니즈는 절대 사라지지 않음. 바둑을 AI가 다 이긴다고 해서 사람들이 바둑을 그만두진 않았음. 근데 "저 사람이 진짜 자기 머리로 두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으면, 온라인 대전이라는 형식 자체가 신뢰를 잃게 됨. 리쉬안하오 사건이 보여준 것처럼, 중앙 기관에 맡기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묻혀버림.
여기서 내가 처음 생각한 답은 꽤 원시적이었음. "내 친구인데 얘는 치팅 안 해, 같이 하자." 오프라인에서 같이 둬본 적 있는 사람, 실력을 직접 확인한 사람끼리 매칭하는 거.
그런데 이걸 한 단계 확장하면 구조가 보이기 시작함.
내가 보증하는 친구, 그 친구가 보증하는 또 다른 친구, 그 네트워크가 보증하는 또 다른 네트워크. 검증된 사람들끼리의 신뢰 체인이 만들어지고, 그 체인 안에서만 매칭이 이루어지는 풀이 형성되는 거. 지금 chess.com이 레이팅 숫자로 매칭해주는 걸, "이 사람은 신뢰 네트워크 안에서 검증된 사람이다"라는 기준으로 매칭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에이전트 시대에는 이 검증을 내 에이전트가 자동으로 수행함. 상대의 플레이 패턴 분석, 네트워크 내 평판 조회, 과거 대국 이력 크로스체크 — 이걸 매칭 전에 실시간으로 돌리는 것.
세 편이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음
여기서 좀 재밌다고 느꼈던 건, 이게 2편에서 했던 얘기랑 완전히 같은 구조라는 거였음.
2편에서 스포티파이 없이 음악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의 답으로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union을 만들고, 에이전트끼리 데이터를 공유한다"고 했음. 게임에서의 "치팅 안 하는 사람들의 신뢰 네트워크"는 이 union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 공유하는 게 취향 데이터냐 신뢰 데이터냐만 다를 뿐, "검증된 네트워크에 속한 에이전트끼리 서로를 인증한다"는 메커니즘은 동일함.
그리고 1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수요초과 시장에서 "이 사람이 진짜 찐팬인지" 증명하는 문제도 같은 구조임. 스포티파이 스트리밍 수치가 아니라, 신뢰 네트워크 안에서 "이 사람이 콘서트도 가고, 앨범도 사고, 커뮤니티에서도 활동하는 진짜 팬"이라는 게 에이전트들 사이에서 교차 검증되는 것.
결국 세 편에 걸쳐 얘기한 게 전부 하나의 질문이었음.
중개자 없는 세계에서 신뢰를 어떻게 만드느냐.
1편에서는 플랫폼이 배분자 역할을 하는 현재 구조의 한계를 봤고, 2편에서는 에이전트가 플랫폼을 우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고, 3편에서 전혀 다른 문제를 통해 같은 결론에 도착한 것. 플랫폼이 해주던 "신뢰 보증"을, 사람과 에이전트로 이루어진 검증 네트워크가 대체하게 된다는 것.
가장 오래된 방식의 디지털 확장
재밌는 건 이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방식이라는 것임. 플랫폼이 존재하기 전에 우리가 신뢰를 만드는 방식이 원래 이거였음. "내가 아는 사람이 보증하는 사람"을 믿는 것. 기술이 한 바퀴를 돌아서 가장 원시적인 신뢰 구조를 디지털로 재현하는 셈.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에이전트 시대의 신뢰 네트워크는 마을 단위의 평판 시스템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 내 에이전트가 관리할 수 있는 신뢰 관계는 수천, 수만 개이고, 네트워크 간의 연결도 자동으로 이루어짐. 인류가 수천 년간 써온 신뢰 구조가, 에이전트를 통해 처음으로 글로벌 스케일로 확장되는 것.
이게 언제 현실이 되느냐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방향은 꽤 확신함. 수요초과 시장의 배분 문제로 시작한 고민이, 게임 치팅이라는 전혀 다른 문제를 거쳐, 결국 "에이전트 시대에 신뢰 인프라를 누가 만드느냐"라는 질문까지 온 것. 그리고 그 답이 거창한 프로토콜이나 블록체인이 아니라 "내 친구인데 얘는 괜찮은 애야"라는 가장 오래된 방식의 디지털 확장이라는 게 좀 맘에 듬.